태권도 반세기
각론 되는 바와 같은 엄연한 사실 때문에 견강부회(牽強附會)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태권도 역사가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태권도를 유구한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고유의 전통 무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보통신(IT) 사회인 현 시점에서는 허구입니다
발전(세계화)이란 명분을 내세워 앞만 보고 달려 왔다면 이제는 내실을 다져야 합니다. 모방도 창조입니다. 가라테를 모체로 근대 무술로 시작된 태권도가 스포츠라는 성격으로 세계화된 것 그 자체로 태권도는 우리의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제는 세계화된 태권도가 태권도 본연의 모습인 무도(태권도)로서 새롭게 태어나 무도태권도로 다시 세계화된 태권도(무도)의 진면목을 보여야 합니다.
총 68회에 걸쳐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태권도 반세기','태권도 現代史', '노병직 관장의 친필 서한'을 참고로 해방과 더불어 태동돼 현재에 이른 태권도의 근대사를 재구성(편집)해 각론 합니다.
태권도 태동과 분열 경기태권도의 은인 - 호구(頀具)
태권도의 경기화에는 무엇보다 호구(몸통보호대) 착용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치명적 공격을 서로 주고받던 초창기 태권도(무도)에서 호구가 없었다면 부상자가 속출할 것은 물론이고 자칫 하면 경기 중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했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호구착용을 의무화한 것은 1968년부터 인데 그때까지는 물론 그 후에도 호구사용(보호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엄운규가 1971년 태권도지 투고를 통해 “종주국의 경기규칙이 아직도 세계적으로 통용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하면서 태권도 경기의 흥미와 판정의 용이성, 선수보호를 위해 호구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습니다.
호구착용(사용) 반대론자들은 가라데 경기(시합)처럼 공격부위 앞에서(한치 앞)에서 공격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을 했는데 그 이유로 선수보호라는 측면과 체구가 큰 서양 사람들을 상대하려면 멀리 떨어져서 가상(헛) 기술을 구사해도 점수가 나올 수 있도록 해야만 우리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상대를 무력화 시킬 수 있도록 힘(power) 있는 공격을 하라면서 상대가 대미지(damage)를 입지 않도록 하라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논리가 아닐 수 없지만 태권도의 몸통보호대(호구)는 세월이 흘러가면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태권도계 원로인 전일섭이 최초로 내놓은 아이디어는 두터운 면의 천(광목) 속에 대나무 막대를 넣어 만든(개발)것으로 길이 7cm, 너비 2cm의 대나무 조각들을 촘촘히 엮어서 광목 재질 커버로 감싼 전근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선수를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고안되었지만 대나무 호구(보호대)는 공격하는 선수들의 주먹과 발은 피투성이가 되기 일쑤였습니다.
또한 끈으로 묶게 되어 있어 경기 중 호구가 벗겨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1975년부터는 대원기업(사장 손원길)에서 기존의 대나무 호구의 문제점을 보완 새로 개발한 PVC재질 호구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최종적으로는 1980년대 들어 재질은 EVA(부드러운)로 교체한 호구가 등장했으며 초기의 호구 착용에 있어서 등 부위 척추를 보호하기 위해 등판과 함께 끈으로 묶었던 번거로움에서 탈피해 끈 대신 밸크로(일명 찍찍이)를 사용해 착용함으로써 실용성과 디자인의 효율성을 크게 높였습니다.
태권도 경기의 고질적 병폐인 판정시비를 근본적으로 근절할 수 있는 방안의 하나로 전자호구를 도입(개발)하는 것이 추진됩니다. 태권도 경기(시합)에서 편파판정으로 올림픽 퇴출이 언급되자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전자호구에 대한 도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제품이 개발됩니다.
하지만 초기에 호구가 등장 할 때와 같이 태권도 기술체계의 단순화와 파워풀한 기술이 구사될 수 없다는 논쟁이 똑 같이 일어나 갑론을박 하다 올림픽 퇴출에 결정적 요소로 작용할 것이란 의기의식에 결국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전자 호구가 도입돼 현재에 이릅니다.
전자호구에 대한 무조권적인 신뢰(판정시비)는 한때 태권도계 뿐 아니라 스포츠계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도입되는데 펜싱이 성공한 경우라면 야구는 실패한 경우이고 태권도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펜싱에서는 칼끝과 호구가 접촉하는 순간 득점판에 불이 들어오도록 설계해 판정시비의 소지를 없앴습니다. 당시 야구의 경우 전자장비가 장착된 야구공이 전자빔이 방출되는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면 자동적으로 스트라이크로 판정되도록 설계(연구)를 했는데 불가(不可)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유는 타자가 휘두르는 방망이 충격을 견뎌 낼만한 전자 공을 만들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태권도에 있어서도 전자 호구는 본래의 목적인 판정시비를 확보(개선)하지 못하고 발 펜싱이라는 오명만을 남긴 실패(?)작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태권도의 본질이 무도인데 무도에서 가장 중시하는 옮고 그름(정의)의 정신을 망각하고 심판들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 판정을 볼모로 처신을 했다는 것은 크나큰 오점으로, 태권도 경기에 있어서 다양하고 파워풀한 기술을 사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전자호구를 대안으로 부상시켰고 그 결과는 태권도 경기의 퇴보(발전저해)를 가져 온 것입니다.
태권도 경기에 있어서 전자호구 아이디어는 원로 이종우가 세계연맹 사무총장으로 재직할 당시 처음 제안했습니다. 1991년 5월 자그레브 월드컵대회 때 각국 임원 코치들에게 첫 개발품을 선보였고 1993년 뉴욕 세계대회 기술위원회와 집행위원회에 개선된 개발품에 대한 설명회를 가졌습니다.
해외에서도 전자호구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미국 및 오스트리아에서 개발된 제품에 대한 성능실험을 국기원에서 몇 차례 가졌습니다. 특히 태권도 8단인 재미변호사 ‘이태희’가 개발한 호구는 펜싱호구와 같이 무선장치를 이용, 경기 때 충격을 전자신호로 바꿔 득점이 모니터와 전광판에 나타날 수 있도록 획기적으로 개선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1987년과 1988년 페어플레이1, 2호로 명명된 전자호구를 내놓았으나 제작비가 비싸고 무겁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시 다년간의 연구 끝에 무게가 가볍고 전기를 통과시키는 특수화학섬유를 개발해 ‘페어플레이 2000을 내놓았고 그 이후 전자 호구는 발전(?)을 거듭해 현재에 이르고 있으나 판정시비의 종식과 태권도 발차기 기술의 화려하고 파워풀한 동작을 구사하기에는 미흡한 미완의 작품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필자의 사적인 의견을 더하자면 누가 뭐라 해도 태권도의 본질인 옮고 그름(무도정신)에 입각한 심판들의 판정만이 태권도의 화려한 발차기 기술의 복원(재현) 및 개발(동작)이 지속 되고 더불어 전 세계인들로부터 사랑(인정) 받는 무도 스포츠(태권도)가 될 것입니다.
다음 28부에서는‘무적의 태권인 최영렬’에 대해 각론합니다.
태권도정보연구소 / 청호태권도장 / 신성환 관장
태권도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http://www.riti.net - 태권도정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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