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반세기

 

각론되는 바와 같은 엄연한 사실 때문에 견강부회(牽強附會)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태권도  역사가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태권도를 유구한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고유의 전통 무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보통신(IT) 사회인 현 시점에서는 허구입니다

 

발전(세계화)이란 명분을 내세워 앞만 보고 달려 왔다면 이제는 내실을 다져야 합니다. 모방도 창조입니다. 가라테를 모체로 근대 무술로 시작된 태권도가 스포츠라는 성격으로 세계화된 것 그 자체로 태권도는 우리의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제는 세계화된 태권도가 태권도 본연의 모습인 무도(태권도)로서 새롭게 태어나 무도태권도로 다시 세계화된 태권도(무도)의 진면목을 보여야 합니다.

 

 

 

총 68회에 걸쳐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태권도 반세기','태권도 現代史', '노병직 관장의 친필 서한'을 참고로 해방과 더불어 태동돼 현재에 이른 태권도의 근대사를 재구성(편집)해 각론 합니다.

 

갈등 및 분열

 

타고난 조직가 - 이종우

 

태권도계에서 조직을 가장 잘 이해한 인물은 이종우 관장입니다. 초기 공수도(태권도)협회를 결성할 때는 물론 협회가 고비를 넘겨가며 발전을 거듭할 때 이종우 관장은 항상 ‘막후 인물’로 활약을 했습니다.

 

태권도의 창시자(시조)라 할 수 있는 1세대들이 독불장군처럼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평가를 받은 반면에 이종우 관장은 2세대 선두주자로 선.후배들을 때로는 설득하고 때로는 압력을 가하면서 협회라는 태권도계 제도권 시스템을 만들어 정착 시켰습니다.

 

외부 인사(힘있는)를 영입해 협회발전에 이용하자는 안을 최초로 낸(제안)것이 이종우 관장였습니다. 이종우 관장은 경기도 이천이 고향인 부친의 6남 2녀 중 끝에서 두 번째로 1928년 10월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은 어려웠지만 항상 씩씩하고 적극적이었던 그는 해방 후 소년단 활동을 하면서 장차 지도자(태권도)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가 가라데를 배우게 된 계기는 그의 장대한 체격(키 180cm)을 눈 여겨 보았던 ‘소년단 중구 지대장’의 권유 때문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무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지대장의 소개로 소공동에 있던 ‘조선연무관’을 찾습니다. 일본 강덕관 지부로 유도를 가르치던 이곳은 해방 후 이경석, 최영호, 강낙원 등 유도계의 원로들이 정부로 부터 불하받아 유도도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해방 전후 유도 유단자들에게 가라데를 가르쳐 왔던 전상섭이 이경석의 허락을 받아 1946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도장의 절반을 가라데 도장으로 전용해 ‘조선연무관공수도부’를 출범시켰던 곳입니다.

 

이종우가 조선 연무관에 입관(수련)한 것은 3월(23일)이며 그 무렵 조선연무관(YMCA권법부) 창단멤버인 배영기, 전일섭, 김복남 등은 이종우 보다 20여일 먼저 입관(문)한 선배들입니다.

 

이종우는 연무관에서 전상섭과 조영주로부터 가라데를 배웠습니다. 태동기(초창기) 태권도(공수도) 수련체계는 관장, 사범, 교사, 수련생으로 이어지는 수련(지도)체계로 주로 처음 입관한 수련생의 지도는 우선적으로 바로 선배(교사)들에 의해서 이뤄지는 체계였습니다.

 

지금처럼 관장, 사범이 처음부터 맞대면(얼굴보며) 하면서 수련(지도)하는 체계가 아니라 철저한 위계질서(관장,사범,교사)에 따라 수련하는 체계였습니다.

 

당시 지도관의 지도체계는 50대 신사였던 조영주가 지도사범으로 있었는데 그는 재일청년단 단장, 민단 단장 등을 역임한 인텔리로 오키나와데 시도류의 실력자였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1948년 또 한 사람의 실력자인 윤쾌병이 일본에서 귀국해 사범으로 취임하면서 변화(문제)가 생깁니다. 도야마루 가라데 7단이었던 윤쾌병은 이종우의 입장에서 볼 때 당시 4단이었던 전상섭이나 조용주에 비해 탁월한 실력자로 보였던 것입니다.

 

윤쾌병이 귀국해 사범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조영주 체제에서 수련했던(친숙했던) 관원들에게는 ‘의리의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윤쾌병에 대한 배척(?)하는 상황이 싹텄던(파벌조성) 것입니다.

 

이런 정서 속에서 이종우는 전체 관원들을 대표해 총대를 멥니다. 그 결과는 일종의 파문이었습니다. 이 상황에 대해 “태권도는 표면적으로 道를 중시하지만 실제로는 과거나 현재나 태권도가 표방하는 정의, 옳고 그름은 없고(뒷전) 오직 人益在權 즉 개인의 영달과 주변 추종자들의 표리부동과 합종연횡이 난무하는 武道로서 갖춰야 할 武道精神은 뒷전인 謀事道였다고 주장”합니다. 아주 심하게 폄하하면 謀事道인 것입니다.

 

이 사태로 인해 도장(조선연무관)에서 퇴출됐던 이종우는 결국 윤쾌병을 사범으로 모시기(인정)로 생각을 바꾸고 1년여만에 복귀합니다. 6.25전쟁 전까지 3단이었던 이종우는 부산 피난시절 국제시장에 있던 건국대 부속 유치원을 빌려 가라데를 수련(전파)시키면서 본격적인 지도자의 길로 나섭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학생유도연맹 부위원장이었던 친구 김인화 등과 협력해 ‘대한공수도연맹’을 결성하는데 앞장서며 공수도연맹의 초대 사무국장을 맡아 ‘조직가’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부산 피난 시절 유치원을 빌려 가라데를 지도(가르치는)하는 것으로는 생계를 유지 할 수 없었던 이종우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입사를 합니다. 이때의 인연으로 수복 후 화신백화점에서 관리부장으로 재직합니다.

 

그러나 이 짧은 직장생활은 조선연무관이 을지로에 있는 한국체육관으로 이관하면서 館 명칭을 ‘지도관’으로 정한 뒤 전국적으로 조직 확대에 나서면서 끝나게 됩니다. 조직가이자 행정가적인 기질을 회사가 아닌 ‘지도관 확장’과 ‘태권도계 통합’에 전념합니다.

 

전쟁 속에서 결성된 ‘대한공수도연맹’은 조선전업 사장인 이중재(李重宰)를 회장에, 고려신문사 사장인 민관식(閔寬植)을 부회장에 영입하는 등 나름대로 태권도계 통합과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속력 부족(황기 이탈)으로 흐지부지 끝나버린 상태가 됩니다.

 

이종우 관장은 비록 태권도 1세대(태동 기 계열관 시조)는 아니었지만 지도관 관장 윤쾌병을 대신해 관장회의에 의견진술은 할 수 있으나 의결권이나 발위권이 없는 옵서버로 참석하는 등 막후에서 협회결성을 위한 의견 조율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이종우 관장이 처음부터 ‘태권도’라는 명칭을 찬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종우 관장은 공수도란 명칭을 끝까지 주장하였습니다. 명칭에 대한 이종우의 고집은 1950년대 말 당시 6군단장으로 태권도계 실세였던 최홍희가 한남동 자택으로 이남석, 엄운규등과 함께 불러 설득과 압력을 가했어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태권도로 하자” 그냥 “공수도로 하자”는 논의가 계속됐으나 어느 쪽으로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결국은 ‘태수도’라는 중간점을 찾습니다.

 

명칭문제에 대해 이종우 관장은 ‘태권도’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기로 획기적인 발전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뿌리가 가라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공수도’를 주장한 것이라고 생전에 주장(회고)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종우 관장의 막후 활약으로 1961년 9월 14일에 ‘대한태수도협회’가 출범됩니다. 이때도 이종우 관장은 태권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내부에서 자리다툼을 하기 보다는 외부에서 실세(세력자)를 영입해야 한다는 믿음(주장)으로 당시 군사정부의 감찰위원장으로 근무하던 ‘채명신(장군)’을 초대 회장으로 영입하는 일에 앞장섭니다.

 

다음 17회에서는‘신흥관 할거와 대한공수도협회 분열’에 관해 각론합니다

 

태권도정보연구소 / 청호태권도장 / 신성환 관장

 

태권도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http://www.riti.net - 태권도정보연구소
http://www.ctu.ne.kr - 태권도지도자교육

http://www.taekwondoforum.net - 태권도포럼

http://www.moodotaekwondo.com - 무도태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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