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반세기
각론되는 바와 같은 엄연한 사실 때문에 견강부회(牽強附會)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태권도 역사가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태권도를 유구한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고유의 전통 무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보통신(IT) 사회인 현 시점에서는 허구입니다
발전(세계화)이란 명분을 내세워 앞만 보고 달려 왔다면 이제는 내실을 다져야 합니다. 모방도 창조입니다. 가라테를 모체로 근대 무술로서 시작된 태권도가 스포츠라는 성격으로 세계화된 것 그 자체로 태권도는 우리의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제는 세계화된 태권도가 태권도 본연의 모습인 무도(태권도)로서 새롭게 태어나 무도태권도로 다시 세계화된 태권도(무도)의 진면목을 보여야 합니다.
총 68회에 걸쳐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태권도 반세기','태권도 現代史', '노병직 관장의 친필 서한'을 참고로 해방과 더불어 태동돼 현재에 이른 태권도의 근대사를 재구성(편집)해 각론 합니다.
갈등 및 분열
배반의 시절 - 청도관
손덕성은 1921년 서울 을지로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권투와 택견을 접한(수련)한 그는 1947년 청도관에 입관해 당수도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손덕성은 청도관 창설자인 이원국에게 당수도를 배웠(전수)습니다.
이원국은 운동을 가르칠 때 도복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넥타이에 정장차림을 하고 구두를 신고 잠깐 도장에 나와서 한번 둘러보고 가는 식이었다고 합니다. 손덕성은 1951년 1․4 후퇴 직후 이원국 관장으로 부터 청도관 2대 관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그 후 서울에 돌아왔을 때 현종명이 청도관(관원)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종명은 자신의 힘으로는 청도관 관원을 지도하는 것이 역부족이라며 손덕성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런 와중에 일본으로 건너간(밀항) 이원국이 책임을 지고 청도관을 운영(맏아)해 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고심 끝에 관장직을 받아들인 손덕성은 민운식, 현종명, 엄운규를 사범으로 임명하고, 그 후 남태희도 사범으로 임명합니다. 사범들의 봉급까지 자비(사비)로 주며 청도관을 운영했다고 ‘태권도반세기’에는 서술되고 있습니다.
손덕성은 청도관을 운영하면서 사재를 털어 봄, 가을 2차례에 걸쳐 정기적인 연무(수련)대회를 열었으며, 청도관 기관지를 발간해 무상으로 배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관장직 수행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청도관 내부에서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손덕성은 일본에 있던 정영택이 청도관 분열을 획책하는 동시에 청도관 내부에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이 야합하여 1959년 6월 일본에 건너가 있는 이원국을 부추겨 이원국 명의로 된 ‘청도관장 임명장’을 엄운규에게 내렸다고 생각합니다.
이 상황을 이해(분석)하면 “청도관 내부적으로 손덕성의 관 운영에 의견이 맞지 않았던 현종명, 엄운규, 남태희와 충돌은 물론, 손덕성과 최홍의 그리고 엄운규의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납니다. 그런 상황은 1959 6월 16일 [서울신문]에 낸 ”성명서“에 고스란히 들어납니다.
“단 임명장이 아닌 지령장이 수중에 난무한 그들의 장래가 또한 지극히 한심하다 아니할 수 없다”라고 하는 부분을 보면 “청도관장 임명장”은 아니지만 “엄운규가 이원국”으로 부터 “청도관 관장에 임명받은 것”으로 손덕성 관장은 이해(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일련의 상황에 대해서 손덕성은 어려울 때 도움을 준 엄운규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에 화가 치밀었을 것입니다. 육군사관학교와 서울대의 태권도 지도를 엄운규에게 맡기는 등 인간적인 배려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최고 학부에서 태권도를 지도한다는 엄운규가 자신을 배신(배척)할 것이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배신을 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손덕성은 “엄운규는 아주 못된 사람이야, 육군통신학교에 있다가 군복을 벗고 제대할 때 갈 곳이 없다고 해서, 청도관에서 당수도를 지도하라고 했더니 고맙다고 할 때는 언제고 말이야,
내가 최홍희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알면서도 엄운규가 최홍희와 결탁을 해서 일본에 있는 이원국 관장에게 편지를 청도관에 불화(不和)가 있는 것처럼 꾸며가지고 말이야,
그런 일이 있고는 며칠이 지나자 이원국 관장의 처제가 형부의 말씀을 전하러 왔다며, 이 관장(이원국)이 한국에 오시면 어떻게 대우를 해주겠느냐고 묻더군, 일본으로 몰래 달아난 사람이 한국에 돌아온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어, 라고 배신당한 것에 대한 울분을 소회했다고 ‘태권도반세기’에서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육군 소장이던 최홍희와 그의 부관 남태희 마저도 엄운규를 지지하자 손덕성은 울화가 치밀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뻘 되는 엄운규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치욕 때문에 1959년 6월 [서울신문]에 ‘청도관 관장명의 성명서’를 광고 형식으로 냅니다.
성명서 내용은 의리와 겸손을 본분으로 맺어진 태권도 청도관원으로서 기히 일부 제명처분을 당한 반동분자의 선동으로 초대 관장 이원국을 기만 연락하여 우후죽순 격으로 발전 육성하는 수십만 관원에 대하여 신의를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배은망덕 낙오자가 되기를 그들은 스스로 택하고 말았다.
그들은 청도관 간부회의 명칭을 도용하여 스스로 제명 공고를 지상에 공포하는 등 가증스럽게도 중상모략을 유포하고 있다(중략~). 수십만 관원을 사랑하고 태권도 청도관의 앞날을 위하여 그러한 배신행위를 하는 자에게 어찌 관장이란 명칭을 물려줄 수 있을까? 단결 맹연습 불원 대회에 대비하고 있으니 유혹치 마시기 바라는 바이다."라고...(태권도반세기 발췌)
이런 상황에서 손덕성은 현종명, 엄운규, 남태희를 제명처분하고, 최홍희의 청도관 명예관장을 취소하는 특단의 조치를 내립니다. 제명 명분은 현종명, 엄운규, 남태희는 청도관의 분열을 부추기는 세력과 결탁해 배신행위를 했다는 것이었고,
최홍희는 사도(斯道) 수련기간을 24년 이라고 허위사실을 기재하여 자기선전만 일삼고 월남 파견 태권도 시범단 인원 선정을 자신(손덕성)과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했다는 것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또 한 민간도장 관장으로서 “동남아태권도시범단”을 파견할 때 단장을 맡게 해달라고 최홍희에게 부탁했으나 이를 거절하며 서로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맞대응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손덕성이 군(軍) 실세였던 최홍희의 청도관 명예 단증(4단)과 명예관장을 취소한 것은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자는 의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운 상태였습니다.
최홍희는 자신이 창립(관)한 오도관과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하면서 손덕성을 고의로 제외시켜 버립니다. 특히 청도관을 대표하는 손덕성을 빼고 사범인 엄운규를 이사로 임명해 망신을(손덕성) 줍니다.
‘세력싸움’에서 밀려난 손덕성은 ‘태권도 하는 놈들 꼴도 보기 싫다'며 대만으로 여행을 떠나는 등 밖으로 겉돌기 시작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태권도는 태권도가 추구하는 옳고 그름인 정의, 대의명분은 없고 오직 자신과 추종세력들의 이익(영달)만을 위하는 합종연횡과 모사만이 판을 치는 것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파렴치한 행위들을 보다 못한 손덕성 관장 밑에서 사범(부)으로 있던 ‘강서종’이 인천을 중심으로 10여개의 청도관 지관을 모아 '국무관(國武館)'을 만들어 손덕성을 관장으로 추대했으나 사양합니다. 청도관 관장에서 물러난 후 설 자리를 잃은 손덕성은 1963년 3월 미국 이민 길에 오릅니다.
이민 길에 오르던 날 그의 곁에는 가족들과 영어 무도잡지 "블랙벨트" 한국특파원 김병수 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김병수는 청도관 관장을 지낸 그가 쓸쓸히 이민을 떠나는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무정함에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고 합니다(태권도반세기).
손덕성은 미국 뉴욕 온 후 6만여 명의 태권도 유단자를 배출했다고 하며 해마다 7~8월에는 ‘썸머캠프'를 여는 등 왕성한 태권도 지도(보급)에 전념했습니다.
손덕성 관장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도장에 나와 태권도를 지도하는 이유에 대해 '태권도를 안 하면 나는 죽는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태권도를 하지 않으면 금방 주름살이 늘고 힘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음 15회차에서는‘협회창립 움직임과 연무시범대회’에 관해 각론합니다
태권도정연구소 / 청호태권도장 / 신성환 관장
태권도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http://www.riti.net - 태권도정보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