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반세기
각론되는 바와 같은 엄연한 사실 때문에 견강부회(牽強附會)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태권도 역사가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태권도를 유구한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고유의 전통 무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보통신(IT) 사회인 현 시점에서는 허구입니다
발전(세계화)이란 명분을 내세워 앞만 보고 달려 왔다면 이제는 내실을 다져야 합니다. 모방도 창조입니다. 가라테를 모체로 근대 무술로서 시작된 태권도가 스포츠라는 성격으로 세계화된 것 그 자체로 태권도는 우리의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제는 세계화된 태권도가 태권도 본연의 모습인 무도(태권도)로서 새롭게 태어나 무도태권도로 다시 세계화된 태권도(무도)의 진면목을 보여야 합니다.
총 40회에 걸쳐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태권도 반세기','태권도 現代史', '노병직 관장의 친필 서한','김호재 학감, 김용길 관장의 증언'을 참고로 해방과 더불어 태동돼 현재에 이른 태권도의 근대사를 재구성(편집)해 각론 합니다.
최초의 인물들 깨끗한 무도인 - 홍정표
홍정표 관장이 ‘YMCA권법부’에서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한 건 22살 때인 1946년이었습니다. YMCA권법부를 택한 이유는 집과 가까운 곳에 있었고 윤병인 관장이 중국(쿵푸), 일본(가라데) 무술을 두루 섭렵한 것에 매력(관심)을 가졌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홍정표 관장은 YMCA권법부에서 가라데(태권도)를 배우기 전에는 유도를 배웠다고 합니다. 유도를 배울 때 이미 무술에 관심이 많아서 나름대로 무술서적을 보면서 다양한 무술(쿵푸, 가라데)을 연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홍정표 관장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그 와중에 합천 해인사 주지로 있던 최봉술 스님의 권유로 1951년 겨울 해인사에 잠시 머물렀는데 그해 10월 중동중학교 해인분교가 개교되자 체육교사로 재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당수부’를 만들어 방과 후에 30여 명의 학생들을 지도(수련) 했다고 합니다. 그때 홍정표 관장은 “날아다닌다”고 할 정도로 혈기 왕성했다고 하며, 이환경 스님의 권유로 한동안(1954년까지) 승려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무술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홍정표 관장은 태권도(공수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중 1955년 서울대학교에 행정직을 얻어 서울로 돌아오게 됩니다. 태권도(공수도) 수련에 미련을 갖고 있던 터라 올라오자마자 바로 서울대생들에게 태권도(공수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서울대생들에게 태권도를 지도하면서 연대생들에게 태권도를 지도하고 있었던 박철희 사범과 자연스럽게 합류(수련에 대한 교류)를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강덕원’을 같이 개관합니다.
이 과정(상황)에 대해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에서는‘강덕원’은 ‘홍정표와 박철희에 의해 신설동에서 창관(설) 된 것’이라고 서술되고 있습니다.
홍정표 관장은 이남석 관장이 YMCA권법부(후일의 창무관)를 일으켜 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창무관’을 자신의 사관화(개인세력화)를 한다고 비판하고 있던 터라 이남석 관장과 갈등을 합니다. YMCA권법부 1기생은 이남석을 비롯해 박철희, 김선구, 김주갑, 박기태, 김순배 등이었습니다.
홍정표 관장은 무도로서의 '덕'을 중시하며 그 덕을 가르친다는 의미를 강조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당시 모든 도장들이 ‘館’이라고 불렀지만 ‘館’ 보다는 학술적 의미가 있는 ‘院’을 선호(택)해 ‘강덕원’이라 명명했다고 합니다.
講德院(강덕원)은 서울 신설동에서 시작하여 충신동, 청진동, 서대문(형무소), 서울운동장, 서대문(로타리) 등으로 도장 위치를 옮겨 다녔습니다. 1대 관장에 홍정표, 2대 관장은 박철희, 3대 관장은 이금홍으로 이어졌습니다.
홍정표가 강덕원 관장직을 박철희 사범에게 인계한 것은 나이는 어리지만 YMCA 권법부 동기생이며 ‘강덕원’을 함께 만드는 과정에서 믿음이 생겼고, 젊고 지혜로워 ‘강덕원’을 잘 이끌 것이라는 확신(판단) 때문이었다고 회고합니다.
서울대생들의 태권도(공수도) 수련(지도)은 계속됩니다. 1962년경에는 서울대 본부 학생과로 보직을 옮겼는데, 때마침 법대생들이 태권도부를 결성하고 그를 지도사범으로 초빙합니다.
학생들의 요청에 나름 무도정신을 심어주고 수련도(공수도) 할(전수) 겸해서 학생들의 요청에 흔쾌히 응해 서울대학교 공수도부 수련에 초석을 다집니다.
홍정표 관장은‘흥무관(興武館)’을 창설(관)합니다. 흥무관은 말 그대로 ‘무(武)’를 일으킨다는 뜻을 갖고 창관을 하지만 당시 태권도계는 초창기협회 창립을 둘러싸고 서로 이전투구를 하며 대립할 때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박철희 사범과 함께 만든 ‘강덕원’의 관세가 커지자 강덕원을 모략하고 견제하는 단체가 생겼고, 이런 단체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홍정표 관장은 ‘강덕원’을 떠나 ‘흥무관’을 만들게 됩니다.
무덕관 김인석 관장이 최남도 부관장과의 갈등에서 “관리관”이란 것을 잠시 운영하던 것과는 상황이 다르지만 과거나 현재나 태권도는 무도의 본질인 무도정신과는 배척되는 ‘모사’와 자신들의 안위 및 개인영달을 위한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것은 다름없이 존재하는 엄연한 현실(사실)인 것 같습니다.
당시는 태권도 춘추전국시대였습니다. 홍정표 관장이 어렵게 만든 ‘흥무관’은 1973년 서울대가 관악구로 이전하면서 없어졌습니다.
10년간 ‘흥무관’에서 태권도(공수도)를 수련한 학생들은 주로 법대생이었지만 사범대나 공대생들도 더러 있었다고 합니다. 연세대와 서울대를 주축으로 한 엘리트 집단의 무도계 세력화가 태권도계 전체의 판도를 달리 할 수 있었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 찻잔 속의 폭풍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비사로 남은 아쉬움이 있는 상황입니다.
‘흥무관’ 수련생으로는 최기선(인천광역시장)을 비롯하여 신기남(국회의원), 이협(국회의원), 이강희, 김판금, 나종남, 김병수(미국 휴스턴 사범), 지승원(한국신학원장) 등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지승원이 품새(형)를 전수 받은 수제자였다고 합니다.
홍정표 관장은 수련시 주로 형(가라데)을 가르쳤다(수련)고 합니다. 이유는 땅 위에 서서 우주를 상대로 큰 마음을 품고 정신을 수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련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시 서울대 각 단과대학 학생들이 축제기간 중에 태권도 연무대회를 열었습니다. 서울대 연무대회는 1966년에 처음으로 열렸습니다. 연무대회는 태권도 전문인이 아닌 일반 학생들이 그동안 수련한 것을 보여주는 자리였습니다.
연무대회의 주된 내용은 평안 2형, 4면 격파, 2단 앞차기. 회전 돌려차기, 평안 5형, 호구대련(대나무), 모듬발차기, 철기 2단, 고려형, 연비형, 십수형 등 형(품새) 위주의 시범이었다고 합니다. 홍정표 관장은 서울대에서 행정직으로 근무하면서 1973년까지 협회(초창기) 실무직을 두루 역임했습니다.
그때 한무관 창립자인 이교윤 관장도 심판원이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는 절친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당시 홍정표 관장은 협회(태수도협회)가 주관한 고단자 심사를 위해 전주와 마산에 자주 내려가곤 했는데, 각 지방마다 기간도장의 특성이 강해, 협회에서는 심사 안배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승단심사는 형과 대련을 합해서 60점이 되면 합격이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심사판정에 문제가 많지만, 그때는 더 심한 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심사판정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라고 인지(생각)하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입니다.
예로 대회를 주최한 그 지방의 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심판을 매수하는 등 잦은 마찰과 시비가 벌어졌다고 하는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50년이 지난 지금이나 그때나 달라진 것이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개선된 것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홍정표 관장은 1983년 57세로 정년퇴직했으나 그 후 ‘YMCA권법부를 살리자‘는 운동이 전개돼 명예 이사로 참여하게 됩니다. 당시 박철희 사범도 미국에서 귀국했던 터라 6.25전쟁으로 맥이 끊긴 ’YMCA권법부‘를 살리는 데 뜻을 같이 합니다.
다음 회에서는 ‘내가 최고다 청도관과 무덕관의 쟁패’에 관해 각론합니다.
태권도정보연구소 / 청호태권도장 / 신성환 관장
태권도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http://www.riti.net - 태권도정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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