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반세기
각론되는 바와 같은 엄연한 사실 때문에 견강부회(牽強附會)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태권도 역사가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태권도를 유구한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고유의 전통 무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보통신(IT) 사회인 현 시점에서는 허구입니다.
총 40회에 걸쳐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태권도 반세기','태권도 現代史', '노병직 관장님의 친필 서한','김용길 관장님의 증언'을 토대(참고)로 해방과 더불어 태동돼 현재에 이른 태권도의 근대사를 재구성(편집)해 각론 합니다
최초의 인물들 연세대학교 엘리트들이 결성한 강덕원
연세대 엘리트들이 창관한 ‘강덕원’은 기간도장 중 가장 관세(館勢)가 미약했습니다. 강덕원이 창설되는 계기는 혈기 왕성한 철모르는 YMCA 권법부 학생들(수련생)의 일종의 해프닝(?)에서 시작됩니다.
윤병인 관장의 행방불명으로 이남석 관장이 이끄는 YMCA 권법부는 리더십 부재(불만)로 인한 갈등 속에 홍정표, 박철희에게 ‘강덕원’ 창립에 대한 결정적 원인 제공을 합니다.
홍정표는 당시 태권도가 활성화되는 태권도계의 춘추전국시대에 대해 쓴 소리(불만)를 표출하며 태권도계 활성화가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에 분개합니다.
특히 YMCA 권법부가 이남석과 김순배 관장에 의해 개인 관(세력)화 한다는 판단에 불만이 최고조에 이릅니다. 홍정표의 이런 생각은 지금의 태권도계(국기원, KTA, 시도협회) 조직과 일선태권도장의 태권도 모습이 태권도 본래 모습에서 벗어나 이상한 방향으로 고착화 되는 것을 지적하는 필자와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태권도가 초기 5대 기간도장에서 여러 개의 파생관이 활성화가 되어 소위 태권도계의 춘추전국시대를 맞는 태권도 수련 붐이 일어난 것에 대해 옳지 않은 방향의 활성화(붐)에 대해 홍정표 관장은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에 대해 심정을 표출했다고 ‘태권도반세기’에 서술되고 있습니다.
“타오르는 불길 같은 태권도의 저변 확대에 편승해 무술(계)이 날뛰는 형국이다. 이 무술(태권도)이 기업화하고 있음이 안타깝다. 이 붐을 타고 날뛰는 괴상한 무술은 정통을 외면한 사이비 무술형태의 탄생이다.
스승과 선 후배간의 배신과 반목이 현실의 일상이 되고 있다. 외국 파견을 미끼로 흥정을 하고 외국에서는 태권도의 신비성(무도정신)과 스승을 내세워 스스로를 선전해 돈을 번 후 사라지는 풍토를 어찌할 것인가?라고 한탄을 했다고 합니다.
깨끗한 무도인 이라고 정평이 나 있는 홍정표 관장은 그런 지적(분개)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태권도 태동 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태권도계(조직)가 썩어 문드러진 것과 같이 태동기 난무하는 각 계역관의 파생과 무도로서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자신(개인)의 이해 상관에 의해 각 관들이 분열하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것에 대한 개탄이 여실히 드러나는 지적으로 필자는 십분 이해가 됩니다.
강덕원은 전쟁(6.25동란)이 끝난 뒤 어수선하던 시기인 1956년 9월 중앙기독교청년회(YMCA)권법부에서 이남석 등과 같이 수련한 홍정표, 박철희 두 사람에 의해 서울 신설동에서 창설(관)됩니다.
강덕원의 시작은 홍정표가 개인적으로 도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과 위에 서술된 개탄하는 내용과 무관하지 않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태권도가 무분별하게 파생되고 상업화하는 것에 대해 심한 자괴감을 갖고 있던 홍정표 관장은 독자적인 도장을 개설해 노출되는 문제를 해소하고자 했던 것으로 필자는 생각합니다.
개설된 도장 처음 명칭은 “무도원택권권법도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홍정표 관장이 개인사정으로 박철희 사범에게 맡기면서 “강덕원무도회”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됩니다.
박철희 사범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태권도 관련 조직이 흩어(분관)질 때 ‘중앙기독교청년회(YMCA)권법부’라는 줄기에서 창무관이 먼저 가지를 뻗고 그 후 강덕원이 가지를 뻗은 것이기 때문에 강덕원을 창무관의 분관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강덕원이 창설되는 계기 중 한 요인은 혈기 왕성한 수련생들이 스승(관장)에게 반기(대든)을 든 것도 하나의 창설(관) 계기가 됩니다. 도장(YMCA권법부)에서 이남석 관장의 지도 노선(방법)에 불만을 품고 관장이 출타한 사이에 잉크병을 집어던지고 후배들을 구타하는 등 난동(불만을 표출)을 벌이고 도장을 뛰쳐나와 운동을 중단하고 대학(연세대)에 들어간 후 당수도부를 결성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 중의 하나입니다.
한창 힘과 재기가 발랄했던 이들은 개교 기념일에 누가 시키지도 않은 격파시범을 보이는 등 학교(연세대)에 당수도(태권도)를 보급했으며 조교를 설득해 체육학점에 8학점을 인정받는 정규과목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 결과 3백 여명의 학생들이 동년배인 보성고 출신의 홍정표, 박철희, 이금홍, 나종남 에게 태권도(당수도)를 배우게(수련) 됩니다.
그 과정에서 승급, 승단 심사로 문제가 생깁니다. 자신들이 태권도를 보급하고 가르치는 것은 가능했지만 단증은 발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해법으로 생각해 낸 것이 창무관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남석 관장의 리더쉽 부재에 불만을 품고 뛰쳐나온 창무관에 다시 들어(합류)간다는 것이 녹녹치만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찾은 대안이 여러 교범(당시 사범을 부른 던 호칭)들 중에서 자신들을 가장 잘 이해해 주었던 박철희 사범을 초빙해 승단심사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보성고 동문)은 박철희 사범을 교범을 모시고 의정부와 동두천 등에도 태권도 보급에 나섭니다. 이금홍 등이 2학년에 올라갈 즈음 의정부 읍내 극장을 빌려 시범을 보이기도 합니다.
지역사회에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은 태권도 수련을 통해 ‘불량 청소년 선도’였습니다. 엘리트(연세대) 학생들의 이런 가상한 뜻에 감응한 읍장과 경철서장은 20평 남짓한 전매청 창고를 ‘의정부 공수도장’으로 내줍니다.
이에 힘을 얻은 연세대생들은 동두천까지 세력을 뻗쳤으며 이것을 기반으로 홍정표, 박철희 등이 5.16을 즈음해 강덕원을 창설한 것입니다.
강덕원은 제자중의 하나인 이영일이 자신의 근무지인 광주와 제주에도 진출했으나 박철희가 1970년대 초 미국으로 가고, 의정부, 동두천지부가 지도관으로 전향(흡수)하는 바람에 크게 관세가 약화됩니다.
새로 창관(개설)된 ‘강덕원’은 창무관에 버금가는 세력은 아니었지만 태권도계의 엘리트 집단 양성소란 명성으로 자리 매김하여 태권도계에 ‘엘리트 집단’이란 명성을 얻었습니다.
참고로 현역 장교 출신인 박철희 역시 윤병인으로 부터 배운 무술을 응용해 ‘파사권법’이란 독특한 무술을 창안할 정도의 실력자였습니다.
강덕원 출신으로는 후일 태권도협회 5대 회장을 지낸 정치인 김용채를 비롯해 정화, 이정후, 이강희, 한정일, 김병수, 임복진 등이 있습니다.
다음 회에서는 ‘깨끗한 무도인 홍정표’에 관해 각론합니다
태권도정보연구소 / 청호태권도장 / 신성환 관장
태권도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http://www.riti.net - 태권도정보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