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반세기

 

각론되는 바와 같은 엄연한 사실 때문에 견강부회(牽強附會)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태권도 역사가 재정립되어야 합니다. 태권도를 유구한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고유의 전통 무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보통신(IT) 사회인 현 시점에서는 허구입니다.

 

 

총 40회에 걸쳐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태권도 반세기','태권도 現代史', '노병직 관장님의 친필 서한','도산체육관 김용길 관장님의 증언'을 토대(참고)로 해방과 더불어 태동돼 현재에 이른 태권도의 근대사를 재구성(편집)해 각론 합니다

 

최초의 인물들

작지만 당찬 노병직 - 송무관

 

노병직 관장도 일제 강점기 일본 ‘송도관’에서 공수도(가라데)를 수련했습니다. 노병직 관장은 방학 때마다 고향인 개성 자남산(子男山)에 있던 ‘관덕정’에서 사람들(청년)을 모아놓고 공수도(쇼또강류)를 지도(수련)했다고 합니다.

 

그 후 1944년 2월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노병직 관장은 바로 3월에 공수도 송무관 도장개설 신청을 하고 승인을 받아 ‘공수도(송무관) 도장’을 개설합니다. 개설과 관련한 신청내용은 단체명 공수도 송무관, 장소 개성시 자남동 관덕정 정자 건물, 지도사범 노병직, 교습내용은 일본 공수도, 교습시간은 오전 6시부터 8시까지로 신청해 승인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한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인 5인 이상이 모이면 당국의 허가가 있어야 되는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무술수련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상항으로 더욱 까다롭고 허가가 안 나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당국(조선총독부)으로부터 허가(승인)가 된 것은 아마도 일본 무술(도)인 가라데를 보급(가르치는 것)한다는 것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당시 총독부는 어떻게 든 조선의 흔적 특히 무술 관련 수련을 막으려고 하던 상황이었지만 일본 무술을 지도한다는 것은 해가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44년 3월 20일 송무관이 개관(창설)됩니다. 송무관 창관일을 1944년 3월 20일과 1944년 7월 25일 이라는 설이 있는데 제 1회 승급심사가 1944년 7월 25일에 이루워졌다는 점에서 내부적인 창설(개관)일은 1944년 3월 20일이 맞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노병직 관장이 도장 명을 ‘송무관’으로 한 것은 소나무의 항상 푸르고 역동적인 의미와 노병직 관장의 고향인 개성의 옛 이름이 송도(松都)이며, 일본에서 가라데를 익힌(수련한) 곳이 송도관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개설된 공수도(가라데) 도장인 송무관은 1944년 8월 청,장년들이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가는 상황 때문에 노병직 관장은 무술수련(공수도)을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해방이 된 후 노병직 관장은 ‘공수도 송무관’을 ‘당수도 송무관’으로 개칭하고 1946년 5월 개성 동흥동에서 송무관 간판을 다시(재개관) 내 걸었습니다. 일종의 재 개관을 한 것입니다. 공수도 송무관에서 당수도 송무관으로 명칭을 바꾼 이유가 뭔지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 해봤지만 명확한 이유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필자 개인적인 생각(추측)으로는 당시 모든 기간도장(초기 5개 개설도장)이 당수도란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1946년 5월 송무관이라는 간판으로 다시 개관(설) 해 후진을 양성하기 시작한 노병직 관장은 청도관(靑濤館)을 창설한 이원국 관장이 송무관을 창설하는데 도움을 주고 송무관 이름까지 지어줬다는 소문은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반박합니다.

 

노병직 관장은 개성의 민완식 소유의 건물에 당수도 송무관 현판을 내걸고 후진을 양성(수련)했습니다. 수련 형태는 유급자와 유단자가 수련하는 형(型)을 구분해 가르쳤다고 합니다.

 

유급자에게는 태극 초단~3단, 평안 초단~5단형을 가르쳤고, 유단자에게는 철기 초단~3단 십수, 발색, 공상군 형등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위 형(품새)들에 대해서 필자는 잘 알지 못합니다. 평안 철기형이 기존의 팔괘 품새와 동일(상당부문)하다는 정도 외에 직접 시연은 해보지 못했습니다.

 

승급심사는 6개월에 한 번씩 실시했는데 심사내용은 약속대련(겨루기)인 1보, 2보, 3보 대련과 자유대련 및 형(품새) 위주로 평가를 했다고 합니다.

 

자유대련은 4급 이상만 기회를 부여했고, 초단 응심자는 반드시 격파를 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당시 노병직 관장의 제자였던 이영섭(송무관 2대 관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증언)하고 있습니다.

 

“노병직 관장은 수련시간을 중시했습니다. 수련시간이 되면 한 명의 수련생이 와도 지도(수련)을 했습니다. 수련생들이 도장에 도착하면 100번 이상 권고(주먹 단련대)를 치게 한 다음 본격적으로 수련에 들어갔습니다.

 

대련(자유겨루기)을 할 때는 인정사정이 없었고 4급 이상은 실전 대련을 시켰는데 상대가 본인보다 체격이 크면 상대방이 쓰러질 때까지 시켰습니다.

 

또 영하 10도 이상인 강추위에 난로가 없어 땀이 났다가 금방 얼어붙는 상황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련을 계속 하였습니다. 일종의 모한수련(冒寒修練)을 한 것입니다“고 회고 합니다. 위 회고를 보면 태권도 수련에서 강조하는 극기, 인내, 노력을 실천(체험)하도록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당시 송무관은 6개월에 한 번씩 승단 심사를 봤다고 합니다. 다른 도장과 특별한 것은 심사에서 반드시 ‘격파’ 부분을 통과해야 승단(합격)을 시켰다고 합니다.

 

당시 송무관 출신으로는 이회순, 이영섭, 김홍빈, 한상만, 송태학, 이희진, 조규장, 홍영찬, 강원식 김용길 등이 있지만 5대 기간도장 중 가장 관세(館勢)가 미약했습니다.

 

다음 회에서는 ‘군인 최홍희 오도관(吾道館)’에 관해 각론합니다

 

 태권도정보연구소 / 신성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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